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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정류(靜流) 이상근 목사 (110)
[[제1579호]  2018년 1월  13일]

깊은 우정을 나눴던 조성암 목사

3. 대구남산교회 4

 

남산교회도 시대적인 아픔의 현장을 지켰던 교회였음이 다음 문장의 글에서도 분명히 나타난다.

1930 두번째 성전이 건립된 다음 해인 1931년에 세워진 종각이 일제에 의하여 강제 징수된 1948 6 6 예산 23,600원으로 철주 종각을 완공하여 대구 도성에 울렸는데 [...] 해방과 자유의 종각으로 상징되었다.

우리 교회는 민족적인 과제 앞에서 외면하지 않고 구국일념의 신앙을 가진 것을 앞에서도 여러 강조하였거니와 특히 6.25라는 동족의 심장을 도려내는 아픔 속에서 위기일발의 순간에서까지 하나님께 매달리면서 무릎이 닳도록 모여서 합심기도하고 하나님 앞에 절규했다.

인간이 살아가는 현실의 삶의 아픈 흔적들을 달리 표현할 길이 없었던 사람들이 마음을 시나 소설 등으로 표현한다. 교회도 세상 속의 교회이기에 세상이 당하는 아픔을 당하게 되고 세상의 운명에 함께 동참하여 역사의 현장을 지키기에 민족적인 아픔의 현장에 함께 했고 때로는 아픔의 고통이 너무 컸기에 그것을 피하고자 했던 자들과 아픔을 감내하며 죽음 앞에 담대히 섰던 자들의 소리가 혼재해 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지금도 여전히 교회는 세상 속에 있으면서 세상과 구별되기 위해 몸부림을 친다. 주님 오시기까지 교회는 여전히 도상(道上) 존재로 험난한 세월과 싸우고 있다.    

필자는 조성암을 알지 못한다. 청년 시절 이웃 교회인 남산교회에서 예배드릴 멀찍이서 기억 밖에 특별한 만남을 가지지 못하여 기억하는 것이 거의 없다. 그런데 정류와 관련하여 글을 써야 하기에대구남산교회 100년사'에서 살펴 것을 찾았다. 그에 관하여 것이 많겠지만 글은 정류에 관한 글이기에 정류와 깊이 관련된 사실만 간략히 다룰 것이다. 그것은 정류와 조성암은 깊은 우정을 나누는 사이였기에 어떻게 정류와 조성암이 우정을 나누는 사이가 되었는지를 알고자하는 호기심 때문이다. 그래서대구남산교회 100년사' 나타나는 남산교회 담임목사로 조성암이 시무했던 시기를 간략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대구남산교회 100년사' 500쪽에 보면4 조성암 목사의 부임과 영혼의 봄날들(1962-1982)이란 제목이 붙어 있다. 제목부터 범상치 않고 이분이 남산교회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짐작하게 하는 제목이다. 그리고 1963 조성암 목사의 위임과 더불어 우리 교회는 안정되고 신령한 교회의 기틀을 갖추게 되었다.

남산교회는 이런 제목을 붙여 조성암을 기릴까?하는 질문을 가지고 읽다보니 조성암이 남산교회 담임목사로 오기까지 남산교회가 당한 아픔의 시간들이 보였다.

목자 없는 어린 . 1958 2, 김용규 목사의 사임 이후로 5년간은 우리 교회의 공백기였다고 있다. 5 조성암을 담임으로 청빙한 후의 기록을 살펴보면조성암 목사의 부임과 신령한 교회 제목으로 시작되는 글은 아래와 같다.

1962 5 19일은 대구남산교회가 새로운 다짐을 알리는 역사적인 결정의 순간이었다. 조성암 목사를 위임 목사로 청빙하기로 결정하고 1963 3 31일에 우리 교회 10 담임목사의 위임식을 하기로 가결했던 것이다. 위임 목사를 결정하기까지 그긴 공백기간을 생각하면 우리 교회가 목회자를 모시는데 얼마나 고심하고 신중했는가를 가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매사를 신중하고 정성스럽게 합리적으로 처리하다 보니 가끔 정적인 교회라고 하기도 하지만 어떤 특정한 문제 앞에서 과격하거나 과욕하지 않고 파열음이 없었다. 생각에 생각을, 기도에 기도를, 그리고 합리성과 정확성을 찾고 지키려고 애써왔기에 사소한 일에나 큰일에 있어서나 크게 동요되지 않고 깊은 바다에 비할 있을 정도의 전통이 면면히 나타나고 있다.

남산교회가 조성암이 아직 담임목사로 것도 아니고 1 전인 조성암을 담임목사로 청빙하기로 날을대구남산교회가 새로운 다짐을 알리는 역사적인 결정의 순간으로 기록한다는 것은 그를 얼마나 신뢰하고 지지하는지를 만하다.

당시 조성암은 대구고등성경학교의 교장으로 일하고 있었는데 그를 학생들이 존경하고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있었기에 남산교회는학생들의 신경을 건드리지 않기 위해서 조심스럽게 거사를 진행하였다 한다.

남산교회는 조성암이 일했던 시기를 시작하면서무엇보다도 목사의 신앙과 삶은 하나님의 말씀에 충실한 신령한 교회, 하나님을 중심으로 교회, 영성을 깨우는 교회로서의 영적 공동체로 거듭나는 계기를 갖게 하였다. 시작한다.

그런데 남산교회가 이토록 조성암을 특별하게 기리는 이유가 무엇일까?

남산교회는 조성암이 담임목사로 부임하면서전도와 교육과 교회의 시설 확충 단계적으로 교회의 모습을 갖추어 갔다.그러면서 남산교회는 자신들의 담임목사를 얼마나 끔찍이 사랑하고 존경했는지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조성암 목사의 인성덕성영성과 희생정신은, 대구남산교회가 있었기 때문에 조성암 목사가 있는 것이 아니라 조성암 목사가 있었기에 대구남산교회가 있다고 있을 정도로 대구남산교회는 조성암 목사의 부임과 더불어 영적 중흥기로서 새로운 전기를 마련해 나가게 되었다.

사람이 사람에게 받을 있는 찬사 중에서 이보다 좋은 찬사가 있을까 정도로 남산교회가 조성암을 기린다. 이유가 무엇일까? 필자는 남산교회도 모르고 조성암도 모른다. 그런데 필자가 찾을 있는 이유의 흔적들을 찾을 있었다.

조성암은 남산교회에 부임하여 요란하게 치고 장구 치고 하는 외형적인 정비보다는 그의 성격처럼 조용히 내실을 기하는 개혁을 이루어 갔다. 조성암이 담임목사로 일을대구남산교회 100년사'목양팀의 보강과 교회의 안정이란 제목으로 시작한다.

그동안 침체된 성도들의 신앙에 새로운 호흡을 불어넣기 위하여 목양팀의 정비와 보강책이 강구되었고 일환으로 남녀 전도사를 초빙하여 돕게 했다. 특히 부목사제도를 둠으로써 교회 발전을 질적양적으로 변화시키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1966년에 2부제 예배를 도입, 실시하였고 1978년에는 청년회에서 대학부와 청년부로 분리하여 주일학교 운영체제로 들어갔으며, 종전에는 1 예배의 성가를 청년회가 자원봉사 하여 왔으나 1978 1월에 정식으로 1, 2 성가대가 발족되었다. 1973년에는 학생주일학교를 중등부, 고등부로 분리하였으며, 여전도회도 1975 1월부터 나이를 기준으로 청년 여전도회가 분가하기도 했다. 특히 1978년에 진희성 목사의 부목사 부임과 더불어 교회가 새로운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주일학교와 제직회 기관을 대상으로 수련회를 실시하며 각급 기관은 새로운 활력소를 얻게 되었다.

배재욱 교수

<영남신학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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