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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83호]  2018년 2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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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정류(靜流) 이상근 목사 (111)
[[제1580호]  2018년 1월  20일]

진실한 친구와 함께 한 목회

3. 대구남산교회 5

‘대구남산교회 100년사'는 조성암이 정류와 함께 해방 후 평양에서 목회하다가 남한 땅으로 내려온 이야기와 남한에 내려온 후에는 의성읍교회에서 담임으로 일한 것과 그 당시의 교회 사정을 전한다. 그 당시 경북노회 산하 의성시찰과 청송시찰 중에 목사는 단 한 사람뿐이었다. 그래서 조 목사는 의성읍교회의 양해를 얻어서 일자를 작정하고 일대의 31개 교회를 돌보면서 등에는 성찬기를 메고 성례를 베풀며 순회하였다. 31개 교회의 당회장으로서 태산을 넘어서 협곡으로 개울을 건너서 다녔고 그때에는 교통편이 없어서 도보로 걸어 다닐 수밖에 없었다.

‘대구남산교회 100년사'는 한 교회의 역사를 기록한 책이지만 6.25동란의 광풍이 일어났던 시절의 아픈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소중한 역사이기에 여기 그대로 전한다. 이 역사 속에 조성암의 그릇됨이 드러나고 그를 사람들이 왜 그를 성자라고 칭송하는지가 드러난다.

조 목사께서는 의성읍교회가 6.25동란으로 말미암아 폭격을 받아 무너진 자리에 천막을 쳐 놓고 감부열 선교사에게 도움을 받아 예배당을 복구한 일이 있으며 6.25동란 때는 의성군 시찰장으로 시무하며 북에서 피난 온 교인들과 더불어 산이나 냇가나 어디서든지 항상 같이 노숙하며 행군해서 청도 냇가까지 이르렀다.

청도 냇가에 모인 피난민의 수가 이백만 명 이상이 되었고 아침, 저녁으로 올라가며 내려가며 계속 예배를 인도했고 격려했다. 이백만 피난민 가운데 목사님 세 분 밖에 안 계셨다는 일이 가슴 아픈 일이었다. 피난 행렬의 길이가 30~40리가 되었는데 그 길을 오가면서 위로 격려하였고 그때 다른 목사님들은 읍내에 나가서 피난민들을 위로하고 있었고 조 목사님은 냇가에서 피난민들의 아이들이 죽으면 장사도 지내주고 위로도 했다. 아이들의 아버지는 징용에 끌려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때 감부열 선교사에게 부탁해서 약도 지어 주고 옷도 구해서 입히고 식량도 구해서 나누어 주는 그 일을 현장에서 목사님이 담당하셨다. 그러다가 휴전 한 주간 전인 주일 낮 설교 때 많은 사람이 모였다. 그때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설교할 때에여러분이 씨 뿌려 심은 벼를 하나님이 늦은 비와 이른 비를 내려 가꾸셨고 김도 매고 병도 없게 하셔서 모든 곡식이 누렇게 익어 여러분들을 기다리고 있다”고 전했을 때에 모든 사람들이 북받쳐 울었다. 그때는 실제로 곡식들이 황금 들판을 이루어 모든 오곡백과가 결실하여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때 모든 사람들이 서원하여 하나님 앞에 충성할 것을 다짐했고 두려운 소리지만 그들이 목사님을 향하여 성자라 일렀다. 이유는 다른 목사님들은 다 양떼를 버리고 갔지만, 목사님만은 양떼들과 같이 행군하며 노숙하고 같이 아파하며 싸매주며 생활하셨기 때문에 그들이 그런 말을 한 것 같다.

조성암이 1982년에 교회의 담임목사에서 은퇴하였지만 정류는 1991년에 은퇴를 하였기에 정류와 조성암은 나이 차이가 난다.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평생 가까운 친구로 우정을 나눌 수 있었을까?

정류가 대봉교회에서 목회하던 1952년 아직도 6.25가 진행 중인 상황에서 청송화목교회 부흥회 인도를 부탁받고 대구에서 영천방향에서 노귀재를 넘어 가다 무장한 공산군의 공격을 받고 죽을 고비를 넘기고도 그날 밤 청송화목교회로 가서 부흥회를 인도한 후 대구로 돌아올 때는 가까운 영천 방향으로 오는 길을 택하지 않고 당시 조성암이 목회를 했던 의성에 들러 조성암을 방문한 후 대구로 돌아왔다. 정류는 죽음의 고비를 넘긴 후 자신과 함께 사선을 넘어 평양에서 대구로 온 형이자 친구인 조성암이 있는 의성으로 찾아간 것 같다. 대구제일교회와 대구남산교회는 매우 가까운 거리에 있다. 살아가면서 평생 한 사람이라도 진실한 친구를 가진다면 행복한 사람인데, 정류는 좋은 친구와 가까이에서 살며 우정을 나누고 산 행복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1982년 조성암은 남산교회의 담임목사직을 진희성에게 넘기고 은퇴를 하였다. 진희성은 조성암의 뒤를 이어 1983-2003년까지 20년 동안 담임목사직을 감당하며변화하는 교회, 이웃과 함께하는 교회”를 이루고자 노력하였다. 그가 담임목사직을 감당하는 동안교회 조직 강화와 성장의 기반 조성”을 하였고대구남산교회 헌장과 규약의 제정”을 했다.

진희성이 담임목사로 일하던 1984 12 2일 주일에 대구남산교회는 창립 70주년 기념예배를 드렸다. 그때 정류가 축사를 했다. 그때 정류는한국교회의 새 질서를 구축하는 기수가 되길…”이란 제목으로축사’를 했다. 그런데축사’란 말 뒤에이상근 목사, 모교회 대구제일교회 담임목사”라고 소개를 한다. 정류는 대구남산교회 창립 70주년 기념예배의 축사에서대구남산교회가 대구 교계의 성경연구의 중심부가 된 때가 있었다”고 하면서 남산교회가 한국교회에 공헌한 몇 가지를 언급한다. 그 중에 특이한 것을 아래 적는다.

그 무렵 대구남산교회에서는 매일 새벽기도회를 가져 기도의 열을 일으키고 있었다. 현재 한국교회는 전체적으로 새벽기도회를 가지고 있으나 그것은 해방 이후 조성된 한국교회의 풍속이었고, 해방 이전에 매일 새벽기도회를 가진 것은 대구남산교회가 그 시초에 속한다고 알고 있다. 그렇다면 대구남산교회는 우리 한국교회 전체에 큰 공헌을 한 것이다.

그리고 대구남산교회가 교회의 성종(聖鐘)을 땅속에 묻어 간직한 것은 너무나 훌륭한 사실이었다. 일제 말엽에 전쟁 물자에 궁한 일본 정부는 가정의 유기, 큰 건물의 철문, 교회의 종들을 헌납하도록 강압했다. 그때 일본 군국주의자들은 무서운 폭거를 자행하고 있었으므로 모든 교회는 그 정책에 복종할 수밖에 없었으나 대구남산교회는 아무도 모르게 교회의 성종을 땅속에 묻어 두었던 것이다. 그것은 위험을 각오한 대담한 일이었다.

진희성은 2014년 대구남산교회 창립 100주년 기념행사에서교회를 빛낸 일꾼’으로 선정되었던 인물로대구남산교회 100년사'는 진희성의 목회를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그의 부임과 더불어 우리 교회에 새로운 변화의 바람이 조성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면서 조성암과 진희성을 함께 언급하며 두 명의 전후임 목사의 목회적인 연속성에 가치를 찾고 있다. “조성암 목사의 신령한 교회의 터전에 진희성 목사의 패기와 의욕에 넘친 활동은 제도와 조직과 동력화에서 대내외적인 여건과 함께 성장하는 교회로서의 채비를 갖추게 하였다.”

현재 대구남산교회 담임목사인 지은생은 2009 12월 부임하여 2014년 대구남산교회 창립 100주년 기념행사를 진행했다. ‘대구남산교회 100년사'지은생 목사의 부임과 가정 같은 교회, 교회 같은 가정”란 제목으로 그의 목회를 특징짓고 있다. 힘든 시대를 경험하고 극복한 남산교회가믿음’과행함’으로 가정을 세우고 교회를 세워, 한국교회를 새롭게 하는 일에 일익을 담당하길 기대한다. 

배재욱 교수<영남신학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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