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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인돈이야기
[[제1267호]  2011년 3월  19일]

1. 1. 예명

<1> 출생 배경

 

인돈(Linton, William Alderman)은 1891년 2월 8일 미국 조지아 주의 토머스빌에서 세 번째 어린애로 태어났다. 그는 부농가정의 후손으로 태어났지만 그가 태어날 즈음에는 그 가정은 몰락해서 평범한 한 지주 가정에 불과했다.

 

그의 고조할아버지는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의 아베빌에 살고 있었는데 큰 꿈을 가지고 아들 모세를 미 남부 미개척에 자기 가족을 정착시키기 위해 아들 모세를 많은 노예와 말들과 함께 보냈다. 인돈의 조상은 먼 앞날을 투시하는 선지자적인 안목이 있었던 것 같다. 당시 미국은 대서양부터 태평양까지 전 북미 영토를 미국화 해야 한다는 야심으로 미국 내에 거주하던 인디언들을 추방하기 시작했다.

정부는 미시시피강 동쪽에 살던 7만여 명의 원주민들을 강제 이주시켰는데 특히 5대 부족이 연합한 체로키 인디언들의 추방은 무자비한 것이었다.

 

조지아의 체로키족들은 무력을 사용하지 않고 농부, 대장장이, 목수가 됨으로써 백인들의 세상에 적응하려 했다. 그들은 그리스도교도들과 백인 선교사들도 받아들였다. 이렇게 체로키족이 백인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했는데도 그들이 사는 곳에서 금광이 발견되자 1838년 군대를 동원하여 그들을 추방했다.

 

1838년 10월 1일 첫 번째 집단이 ‘눈물의 행로’를 떠났다. 감금과 굶주림, 갈증과 질병, 과도한 노출로 4,000명의 체로키족이 눈물의 행로 도중 숨졌다. 어떤 사람은 ‘무덤에 들어가기 전의 노파도 무거운 짐을 진 채 걷고 있었다.’고 회술했다. 이때 그들은 자기네 말로 번역된 찬송 ‘나 같은 죄인 살리신’(찬송 305)을 부르고 ‘눈물의 행로’를 떠났으며 이 찬송은 지금도 그들 체로키족의 국가가 되고 있다는 것은 슬픈 이야기다. 그들은 오클라호마 주의 인디언 보호구역으로 강제 이송되었다.

 

이렇게 해서 공동화 된 남부 땅에 부농들이 목화밭을 경작하려고 많은 노예와 함께 이민해 온 것이다. 인돈의 조상들도 그런 개척자 중 하나였다.

 

인돈은 가끔 부모를 따라 할아버지 집에 가면 무릎에 앉아 재롱을 부리며 “할아버지는 어디서 태어나셨어요?”하고 물었다. 그러면 모세는 “반은 조지아에 있고 반은 플로리다에 걸쳐있는 그런 집에서 태어났다.”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당시는 조지아와 플로리다의 경계도 확실치 않은 광활한 땅이었다. 또 농담으로 “추울 때는 플로리다에서 살고 더울 때는 조지아에서 산단다.”라고 하기도 했다.

 

평화롭게 살던 그들이 점차 몰락하게 된 것은 1812년에 있었던 영국과의 전쟁도 있었지만 1860년부터 싹튼 남북전쟁 때문이었다. 대농장과 노예를 거느리고 있던 남부 사람들은 7개 주가 연합하여 남부 연합을 형성하고 미합중국으로부터의 분리를 선언한 뒤 새 정부를 알라버마의 몽고메리에 두고 1861년 4월 12일 미 합중국이 쓰고 있던 사우스캐롤라이나의 섬터요새를 공격함으로 남북전쟁은 시작된다.

 

그러나 지루한 전쟁 끝에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보는 참담한 상황을 겪고 결국 남군은 전쟁에서는 패하고 1863년 노예해방 선언을 맞게 되었다. 남부는 돈은 많았지만 실제로 싸울 수 있는 군인이 많지 않았다고 한다. 돈 있는 가정의 자녀들은 다 장군이어서 훌륭한 종마를 끌고 노예를 데리고 전선에 나가기는 했지만 막상 싸워야 할 졸병이 없었다고 한다.

 

전쟁이 끝난 뒤 노예해방이 되었다고는 하나 노예들은 돈 많은 백인을 의지하지 않고 살 수는 없었다. 또 북부도 소시민들이 이로울 것이 하나도 없었다. 다만 대 자본주들의 활동무대가 남쪽으로 넓어진 것이다. 광활한 농토에 도시가 들어서고 동서 횡단철도로 자본을 축적하며 목화밭을 가꾸어 영국의 방직공장과 거래하던 조지아는 사라졌다. 인돈의 아버지가 어리거나 젊었을 때 그들은 토마스빌보다 훨신 낙후한 남쪽 농장에서 살고 있어서 그들은 이 남북전쟁에서 직접적인 피해는 없었다.

 

그러나 노예해방으로 큰 타격을 받고 농장의 저택을 떠나서 토마스빌로 옮기게 되었다. 토마스빌은 1812년 전쟁 때 공을 세운 국민군 소장 토마스 장군의 이름을 딴 것이라고 한다. 이 지역은 목화 농장 지대로 당시 큰 농장 주인이 입법을 추진하여 토마스빌을 카운티로 승격시켜 놓았다. 이렇게 해서 급격히 현대화되어 가는 도시가 되었다. 인돈이 태어날 무렵, 토마스 카운티는 철도가 부설되고 ‘남부의 겨울 휴양지’로 각광을 받고 있었다. 큰 호텔과 남부 특유의 큰 저택 그리고 농장 저택들이 들어오자 이곳은 교육, 정치, 사회, 경제, 종교의 중심지로 부상했다. 인돈의 아버지 와이츠는 농장보다는 도시를 좋아하고 도시의 교사가 되고 싶어 했다. 이런 전원적인 도시에 아직도 오래된 오크나무를 가진 큰 농장 저택이 있었으며 가끔 길게 치마를 끌며 흰 레이스를 붙인 모자를 쓰고 손에 빗자루를 든 흑인 유모가 크고 아름다운 집의 베란다를 쓸고 있는 광경도 볼 수 있었다.

 

오승재 장로<한남대 명예교수·오정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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