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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선교사 인돈 이야기
[[제1268호]  2011년 3월  26일]

1. 예명

<1> 출생 배경

 

인돈의 어머니 아만다(Alderman, Amanda Fonder) 역시 남편과 비슷한 부유한 집안 출신이었다.

아만다 집안은 토마스 지역의 최초 정착자들로, 아만다의 중간 이름에 들어있는 올더만이나 폰더 같은 이름은 이 지방 유지들의 흔한 이름이었다.

비록 시골이었지만 인돈 네 가족들이 토마스 카운티의 남쪽 땅들의 일부를 거의 가지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인돈은 그런 곳에서 그런 조상의 후손이었던 부모의 세 번째 어린애로 태어났다. 그러나 그는 어린 시절이 행복하지 않았다.

 

첫째 누나는 엘라(Ella)였고, 둘째 아들은 와이체 2세(Wyche Jr.)였다.

아만다가 인돈과 함께 이들 두 아이를 한꺼번에 키운다는 것은 심히 어려운 일이었다. 둘을 키워내고, 셋째 아이를 낳아서 키울 때쯤 아만다는 숨 좀 돌리려니 했는데, 불행하게도 마음의 여유를 가질 새도 없이 큰딸 엘라를 잃었다.

 

1892년 7월, 인돈이 한 살 때의 일이었다. 그 해 10월에 네 번째 어린애인 딸 칼리(Callie Annie)가 태어났다. 그로부터 2년 후 큰형 와이체 2세도 세상을 떠났다. 인돈이 세 살 때의 일이었다.

어린 나이에도 죽음은 슬픈 일이었다. 이제 그의 옆에는 두 살 난 여동생이 있을 뿐이었다. 인돈은 그 누이동생 칼리가 더없이 귀여웠다. 두 아이를 어이없이 떠나보낸 아만다는 그 집에서 더 살기 싫었다.

 

1899년 토마스빌의 좀 번화한 타운으로 이사했다. 이사한 그 이웃집에는 예쁘게 생긴 아그네스네 가족이 살고 있었는데 외로웠던 인돈은 그녀와 친구가 되었다. 그래서 칼리와 함께 자주 방문하기도 하고 아그네스가 집에 찾아오기도 했다.

어머니 아만다는 그녀를 귀여워하며 칼리의 인형을 만들어 줄 때는 아그네스 것도 꼭 같이 만들어주곤 하였다. 칼리도 아그네스를 무척 따랐는데 7살 되던 해에 칼리는 장티푸스로 앓기 시작하더니 얼마 가지 않아 세상을 떴다. 아만다의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의료시설이 가까이에 있는 그곳에서도 건강과 행복이 그녀를 지켜 주지를 못한 것이다.

 

인돈의 슬픔도 그에 못지않았다. 형과 누나를 잃고 어린 누이동생이 그의 기쁨이었는데 여덟 살 되던 해에 또 죽음을 맞은 것이다.

이상하게도 아그네스가 이사 간 그날에 동생을 잃은 것이다. 그래서 두 슬픔이 겹친 것이었다. 아파 누워 있는 동안에도 칼리는 아그네스가 떠났다는 말을 듣고 슬퍼했음이 틀림없다.

 

타운으로 이사한 이래 인돈의 아버지는 자주 집을 비우게 되었다. 아버지는 칠 남매 중 장남이었는데 할아버지가 물려준 농사일을 해야 했는데 농사를 싫어했다. 늘 집안에 남아 부동산 관리를 하는 것도 싫었고 농장 일을 하도록 권하는 아내 아만다의 성화가 더 싫었던 것이다.

 

드디어 인돈이 10살이 되던 1901년 두 부부는 의견차로 많이 싸우더니 드디어 별거하기로 합의를 했다. 법적으로 이혼한 것은 아니었지만 서로 헤어져 살기로 합의한 것이다. 인돈은 이렇게 사랑 없는 부모 사이에서 형제도 없이 홀로 외롭게 성장했다.

그때부터 인돈은 어쩌다 한 번씩 집을 방문하는 아버지를 만날 수 있을 뿐이었다.

이때 홀로 살던 고모 칼이 올케인 아만다가 안 되었는지 그녀 집으로 들어와서 인돈의 어머니를 위로하며 살다가 수년 뒤 아만다가 세상을 뜬 때 애틀랜타의 자기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 연유로 인돈은 칼과의 정이 각별했다.

이 비정상적인 가정생활 속에서도 어린 시절 인돈의 성정은 조용하고 착한 겉모습 그대로였다.

 

물론 거기엔 토마스빌 사람들의 예의바르고 친절한 삶의 행태가 영향을 미치기도 했겠지만, 중요한 것은 남부 부호들의 겉치레가 아니라 인돈의 내면적인 고독과 성숙이었다.

그는 당시 다른 아이들의 경우와 달리 개구리를 잡아서 선생의 책상 속에 넣은 적도 없었고, 동무들과 싸운 일도 없는 그저 조용하고 착한 아이였다.

누구에게 물어도 ‘인돈은 언제나 신사였으며 어렸을 때도 그랬다’라는 것이 정평이었다. 그는 이렇게 불운 속에서 외로움을 이겨내는 데 익숙해지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오승재 장로<한남대 명예교수·오정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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