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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인돈인야기
[[제1270호]  2011년 4월  16일]

1. 예명

<2> 신앙 배경

 

인돈이 졸업을 일 년 앞둔 1911년에 그에게는 큰 결단의 시기가 왔다. 한국 선교사로 가 있던 변요한(Preston, John Fairman; 1903년 내한)이 한국에 충원할 33명의 선교사를 선발하기 위해 미국을 순회하다가 친구 헐 박사가 있는 조지아 주의 애틀랜타를 들른 것이었다. 그는 목포를 중심으로 해남 강진 지방의 교회를 개척했고, 1905년 목포 영흥학교 교장, 1908년 광주 숭일학교 초대 교장을 역임한 분으로 급격히 성장한 한국의 기독교를 몇 사람 안 되는 선교사로는 감당하기 힘들어 1911년에 안식년으로 미국에 와 있는 동안 한국 선교사 지원자를 찾고 있었다.

 

인돈은 변요한의 강연을 듣고 마음에 뜨거운 불이 솟는 것을 느꼈다. 남장로교 해외선교부가 한국에 선교를 시작한 지 20년 만에 1895년에 전주, 1896년에 군산, 1898년에 목포, 1904년에 광주 선교부를 세워 지역별로 활동하는데, 병원, 학교, 교회에 모여드는 사람들을 감당하기에는 각 선교부 인원이 너무 부족하다는 말과 각 선교사들의 구체적이며 희생적인 활동 내용들을 들을 때 젊은 인돈은 걷잡을 수 없는 감동을 받았다.

 

그는 헐 박사와 충분히 상의한 뒤 미국남장로회 해외선교부 실행위원회에 원서를 접수하고 1912년 4월 9일 대학 졸업 전에 선교사 임명장까지 받았다.

이에 당황한 것은 그의 고모 칼이었다. 오빠의 유일한 혈육인 조카가 이름도 모르는 먼 땅으로 선교사가 되어 떠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때 인돈은 6월에 대학 졸업을 앞두고 있었으며 대학에서 수석 학생이었던 그는 졸업 후 바로 GM사에 입사가 보장되어 있었다. 그는 미래가 보장된 촉망 받는 청년이었다. 칼 고모는 그를 눈물로 만류하였다. 만일 회사 취직이 싫으면 자기가 자본을 대서 사업을 할 수 있게 해주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1912년 6월 대학을 졸업한 후 그는 많은 시간을 고모 칼과 함께 보냈다. 대부분의 젊은이들은 자기 의견에 반대하는 친척들은 되도록 피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는 고모를 떠나지 않았다. 고모처럼 어머니를 돌본 사람은 없었다. 고모는 바로 어머니였다. 그런 고모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떠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고모 방에 들어가 오랜 시간 고모를 설득했다. 아마 육신으로는 고모를 따르는 것이 당연하지만 가난한 나라에서 자기를 부르는 음성을 배신할 수 없다고 간곡히 말했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들이 식사를 하러 밖으로 나올 때는 고모는 울어서 눈이 부어 있었고 그는 비교적 평온한 표정으로 나왔다고 그들을 본 사람들이 말했다. 칼이 이 문제로 양보한다는 것은 그녀에게 큰 희생임에 틀림없었다. 그녀는 그의 친구들이 그가 주를 섬기기 위해 먼 나라로 떠나는 것은 매우 영웅적인 행위이며 존경할만한 일이라고 한결같은 찬사를 보내고 있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카 인돈이 자기를 버리지 않고 설득하려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는 신사이며 결코 무례한 일을 하는 아이가 아니었다. 이렇게 해서 결국은 칼은 그에게 양보하고 그를 자랑스럽게 생각했음에 틀림없다. 두 사람은 화해를 한 것이다.

 

인돈은 함께 여름을 보내자는 고모의 청을 기꺼이 들어주었다. 그들은 보통 여름 방학 때 미국의 동북부 해안에 있는 캐나다의 노바스코샤에서 실컷 낚시를 즐겼었는데, 그 해 여름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채 둘이서 노스캐롤라이나의 산으로 갔다. 이 기간의 침묵은 그가 한국 선교사로 평화롭고 조용히 떠나게 하는 데 큰 밑거름이 되었다.

 

1912년이 한국에 가장 많이 선교사를 파송한 때라고 생각된다. 그는 그해 8월 초에 애틀랜타를 떠나 콜로라도 덴버에 있는 친구를 만나본 뒤 8월 23일 어린애를 포함해서 18명이 만추리아 증기선으로 샌프란시스코에서 호놀룰루를 거쳐 9월 20일 목포항에 도착했다. 선교사 중 최소 연소자가 21살인 인돈이었다.

 

인돈이 목포항에서 내렸을 때 어떤 생각을 했는지 알 수 없다. 동서양의 거리가 훨씬 가까워진 오늘날도 세상의 한 끝에서 다른 세상으로 가서 배나 비행기에서 내릴 때에는 착잡한 느낌을 경험한다. 때로 이것을 문화적 충격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많은 이국적인 진풍경들과 생소한 소리들이 꿈속을 헤매는 느낌을 갖게 한다. 이들은 호기심 같은 가벼운 느낌을 줄 수도 있으며 어쩔 때는 강한 공포심으로 다가올 수도 있다. 인돈은 어떠했는지 알 길이 없다. 목포는 상항(商港)으로 1897년에 개항해서 외국인들이 거류하고 있는 번창한 항구였다. 미 남장로교 선교부가 신설된 것은 1898년의 일이었다. 이곳이 인돈이 처음으로 발을 디딘 곳이었다. 당시 한국에는 4개의 선교부(선교거점)가 있었다. 목포 외에 광주, 군산, 전주였으며 그 중에 목포가 가장 약한 곳이었다. 서울에서 교통이 가장 불편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오직 두 가정만 살고 있었다. 하딩(Harding, Maynard C.;1911년 내한, 2년 동안 있다 떠난 의사)과 유서백(Nisbet, John Samuel; 1906년 내한)이 바로 그들이다. 하딩은 그때 2주간 서울에 가 있었기 때문에 유서백 부부가 성금요일에 이들을 영접했다.

 

오승재 장로<한남대 명예교수·오정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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