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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인돈 이야기
[[제1273호]  2011년 5월  7일]

2. 선교현장

3.1 운동과 그의 울분①

 

 

일본의 학정은 점차 심해져서 지식인·학생·종교인뿐만 아니라, 농민·노동자에 이르기까지 모든 국민의 반일감정을 불러일으켰다. 한국이 일본의 무단정치를 겪고 있을 무렵 1918년 1월 미국대통령 윌슨은 14개조로 된 전후 처리원칙을 파리 강화회의에 제출하였는데, 그 가운데 ‘각 민족의 운명은 그 민족 스스로 결정한다’라고 하는, 민족자결의 원칙을 제창하였다.

 

이것은 세계의 피압박민족에 대한 자극제가 되었다. 이 민족자결주의의 새로운 원칙은 항일투쟁을 계속해오고 있던 한국의 독립 운동가들에게 용기를 불어넣은 것이었다. 이와 같은 흐름 속에서 1919년 1월 22일 고종황제가 갑자기 승하하게 되자 일본인들에 의한 독살설이 유포되어 한민족의 일본에 대한 증오는 극도에 달하였다.

 

3·1운동의 주축은 대부분은 종교인들이었다. 3·1 독립선언의 대표 33인은 천도교 측이 15인, 기독교 측이 16인, 불교 측이 2인이었다. 거사일을 3월 1일로 하게 된 것은 3일이 고종의 인산(因山) 날이었으나 2일은 주일이었으므로 하루를 앞당겨 1일로 한 것이다.

 

이 운동은 거의 2달 동안 전국 각지에서 계속되었는데 이는 독립에의 염원이 어느 특출한 애국자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깨어있지 못한 산간벽지 부녀자들, 심지어는 소학교 어린 학생들에게까지 사무쳤던 까닭이고, 이 거족적인 운동이 산간벽지에서 거의 같이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은 고종의 인산에 참여한 전국의 인사들이 각각 제 고장에 내려가서 그 운동을 일으켰고 교회가 그 거대한 조직망을 통해 과감히 운동을 추진했기 때문이다. 운동이 치열해 지자 당황한 일제는 주동자 체포에만 그치지 않고 발포명령을 내렸으며 무차별 학살을 명령했다.

 

인돈이 교장으로 있던 영명학교 선생과 학생들도 3월 6일 군산 장날을 기해 ‘독립만세’를 부르기 위해 기숙사에서 태극기와 독립 선언서를 만들었다. 세브란스의전에 유학 중이던 김병수가 독립선언문을 가져왔었다. 그러나 이것을 안 경찰들이 병원 노무자 중 연약한 자를 붙들어 몹시 압력을 가했기 때문에 병원 노무자는 모든 일을 토설하고 말았다. 그래서 3월 5일 거사 하루 전날 열 사람의 경찰관이 와서 학교 교사를 체포하고 건물을 뒤져서 그들이 찾을 수 있는 모든 혁명적 문건을 압수하였다.

 

그들이 박연세 선생 등을 수갑으로 채워 감옥으로 데려갈 때 학생들은 모두 주변에 무리를 지어 “너희들은 나도 데려가야 한다”고 소리쳤다. 경찰관은 주동자만을 원했다.  그들은 선생들을 체포하여 군산 경찰서를 향했다. 이때 학교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영명학교 운동장에는 학생들이 모여들었고 멜본딘 여학교 학생들도 합세하였다.

이렇게 100여명의 남녀 학생들, 교사들, 구암병원 직원들이 경찰서를 향해 행진해갔다. 가는 길에 군산 초등학교 학생들, 구암교회 교인들이 합세하여 500여 명의 시위군중이 만세를 불렀고 그 중 40여 명이 검거되었다.

 

이 시위는 3월 30일 밤에도 등불을 들고 계속되었다. 이 3·5 만세 사건에 합류한 총 동원 인원은 지식인, 학생, 교인, 일반 시민 등 3만여 명이었으며 이 만세 사건으로 53명이 사망했고 72명이 실형을 당했다고 한다. 이 만세 운동은 한강 이남에서 최초로 일어난 만세 운동으로 군산 시민들은 이를 자랑스럽게 여기며 지금도 구암동 거리에서 3·5 만세운동의 재현을 하고 있다.

 

이것은 당시 군산에 있었던 부위렴 목사의 목격담이다. 만세 운동에 참여한 사람은 마치 짐승을 나르는 무개차에 실린 짐승처럼 감옥에 끌려가 감옥은 빽빽이 들어차고 숨이 막힐 것 같은 고통을 당했다.

 

심히 공격적인 방법으로 격렬한 고문을 했는데 뜨거운 인두로 지지고 손을 묶고 매달아 코에 물을 부었다고 감옥에서 풀려난 사람은 떨면서 말했다. 당국은 기독교인이 모든 사건의 배후에 있다고 생각하여 교회를 불 지르고 많은 목사를 체포하였다.

 

1919년 총회는 전례를 깨고 당시 평양신학교 교장이었던 마포삼열(Moffett, Samuel Auistin; 북장로교 선교사로 1890년 내한) 목사를 총회장으로 선출했다. 한국 사람이면 생명이 위태로웠기 때문이었다.

 

혈기 왕성한 젊은 총각 인돈은 미국에서는 있을 수도 없고 볼 수도 없던 이 약소국가에 대한 학대를 목격하고 큰 울분 속에 5월 4일 미국으로 떠났다. 그 해가 그가 맞는 처음 안식년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계 1차 대전 직후가 되어 배편을 얻기가 어려웠다.

 

결국 그는 기차로 구 소련령 블라디보스토크까지 가서 배를 탈 수 밖에 없었다. 배는 중국 군인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 배는 캐나다의 밴쿠버를 거쳐 영국으로 가서 거기서 중국인에게 군사훈련을 시키기 위해 떠나는 배였다.

 

이 배는 일본이 한국을 점령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의 항구를 통과할 수가 없었다.

그는 이 배에 편승하여 캐나다의 밴쿠버에서 내렸다. 그리고 조지아 주의 애틀랜타에 들려 수일을 지낸 뒤 고향인 토마스빌에 도착했다. 그는 8월에 몬트리트(노스캐롤라이나)에서 열리는 해외 선교사 대회에 참석하여 한국의 실정을 보고할 생각이었다.

 

오승재 장로 <한남대 명예교수·오정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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