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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5.황해도 도지사를 역임한 이기백 장로
[[제1459호]  2015년 5월  23일]

이기백(李基伯, 1907-1951) 장로는 평안북도 선천군 선천면 목수대교회 영수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유년주일학교에 다닐 때부터 신앙심이 투철하여 친구들을 전도했던 이기백 덕분에 목수대교회에 어린이들이 많이 늘어났다.

유난히 영리했던 이기백은 15살 때 평양고등보통학교(평양고보)에 당당히 합격했다. 당시 평양고보는 서울에 있는 경기고등보통학교 다음으로 유명한 학교였다. 그렇기 때문에 북한의 모든 지역에서 우수한 학생들이 몰려와 공부를 하였다.

19273월에 졸업한 이기백은 <중앙무진회사>에서 사원을 모집한다는 소식을 듣고 졸업증서와 최종학년 성적증명서를 발부받고 지원하였다.

다행히 합격한 이기백은 신의주 지점에 발령을 받고 하숙방을 얻어 그곳에 머물면서 신의주동부교회에 출석하였다. 원래 이기백은 주일학교를 열심히 다녔지만 친구를 잘못 만나 타락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날 퇴근길에 찬송소리가 들려서 그 곳을 찾아갔다.

바로 그 교회가 신의주동부교회였다. 당시 신의주동부교회는 김제근 전도사가 시무를 하고 있었는데 아주 열정적으로 설교하는 모습에 은혜를 받아 즉시 교회에 등록하였고 바쁜 직장 생활 속에서도 이기백은 새벽기도회에 열심히 출석하였다.

그가 기도하는 모습에 감동을 받은 김제근 전도사는 19321월 당회장의 허락을 받고 이기백에게 세례를 받게 한 후 서리집사로 임명하였다. 서리집사로 임명 받은 이기백은 하나님의 큰 축복으로 생각하고 더 열심히 교회에 출석하였다.

그는 혼자만 교회에 출석을 한 것이 아니라 꼭 새신자를 전도하고 등록시켜 신의주동부교회 교인으로 정착시켰다. 이기백은 더 열심히 신앙에 매진해야 한다면서 신의주 기독교서점에 나가 쪽복음을 매입하여 새신자들에게 나누어 주면서 신앙에 매진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었다.

서리집사로 임명 받았던 이기백 집사는 19384월 공동의회에서 장로를 선출할 때 뜻밖에 많은 표를 얻어 신의주동부교회 피택장로가 되었다. 주일 오후에는 김제근 전도사가 당회장의 지시대로 장로 교육을 시켰다.

이기백 장로는 신앙생활에 지장이 있다면서 중앙무진회사 간부직을 사임하고 신의주 번화가에 <신일금물점>이란 간판을 걸고 철물도매상을 시작했다.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장사가 잘되었지만 주일만은 문을 걸어 잠그고 주일은 하나님의 날이기 때문에 휴무를 합니다라는 글을 써 붙였다. 이 글을 본 사람들은 그를 진실한 교인으로 알고 평일에 더 많이 드나들었다고 한다.

신의주동부교회는 교회당이 협소하여 2300평 규모의 새 예배당을 신축하였는데 빚 때문에 헌당식을 할 수 없자 이기백은 자신의 주택을 팔아 교회 빚을 갚고 헌당식을 거행하였다. 신의주동부교회는 신의주에서 제일 아름다운 교회 건물로 소문이 났고 일반 시민들이 구경 왔다가 신의주동부교회에 등록하는 일도 있었다.

동부교회는 매년 교인들이 증가해 갔지만 일제의 탄압에 의해 19431229일 해산을 하게 되었다. 이 일로 인하여 이기백 장로는 신의주 제2교회에 출석하였다. 이 교회는 유명한 한경직 목사가 재직하고 있었지만 일제의 탄압에 의해 사임하게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1945815일 해방을 만나자 문 닫았던 교회들이 문을 열게 되었고 신의주동부교회도 문을 열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김일성 정권이 38도 이북을 점령하면서 일제 보다 더 심한 탄압이 몰려왔다. 이 무렵 조만식 장로가 중심이 되어 기독교조선민주당을 창립하고 평북 지방의 책임자가 되었다. 북한에서 조선기독교도연맹을 조직했던 강양욱 목사가 위원장으로 등장하면서 이기백 장로를 회유하였으나 한 마디로 거절하였다.

이 일로 이기백 장로는 수시로 감시를 받아 평양에 머물 수 없게 되었고 1946년 말 황해도로 내려와 피신 겸 요양을 하면서 복음을 전했다. 그러나 북한의 남침으로 6. 25전쟁이 일어났고 생명의 위협을 느낀 이기백 장로는 잠시 산으로 피신을 하게 되었다. 다시 황해도는 공산화가 되었고, 이기백 장로는 하루 속히 북한도 하나님을 믿는 나라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하였다. 결국 그는 공산당에 체포되었고 그 순간에도 당신들도 하나님을 믿어야 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라고 호소를 했지만 결국 그는 학살 당했다. 이 일로 인하여 그의 시신을 찾을 길이 없게 되었다.

먼 훗날 통일이 되면 그의 고향 가까운 산 중턱에 <황해도 도지사> 기념비가 세워졌으면 하는 바 람이다.

김수진목사<한국교회역사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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