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장로신문
뉴스오피니언교양피플미션말씀특별기고 | 지난연재물
[제1676호]  2020년 2월  15일
기사검색
전장연 총회 교단 교계 동정 연합기관행사일정 특별기획 포토에세이
기독교용어해설
성경어휘심층해설
성경난해구절해설
한국교회선교비화
선교기행
신앙소설
북한통신
성경동화
수필릴레이
그날까지
철학이야기
한국역사 그 뒷이야기
5분사색
장로열전
교회와 복지
역사의뒤안길
대인물열전
경제칼럼
국가안보
Home > 미션 > 장로열전
266. 와이즈멘 지도자였던 이기원 장로
[[제1472호]  2015년 8월  29일]

이기원(李基源, 1907-1984) 장로는 경상북도 예천에서 농사 짓는 일을 천직으로 알고 있던 아버지 밑에서 성장을 하였다. 어려서부터 부모가 믿고 있는 기독교의 신앙을 이어 받아 신앙을 간직하게 되었다. 어린 시절부터 부모의 신앙을 따라 경주 중부교회를 출석하면서 기독교에 대한 진리를 터득하게 되었다. 특별히 성탄절이나 부활절이 되면 경주중부교회에서는 주일학교 학생들에게 연극과 합창을 지도 하였는데 그럴때면 학생들은 항상 앞장서서 일을 하였고 이 일로 경주 중부교회는 주일학교 학생들의 열심에 감동이 되어 자연히 주일학교 유년부는 많은 성장을 하게 되었다. 이러한 환경에서 성장했던 이기원은 교회의 당회장 목사의 지도를 많이 받게 되었으며, 그의 신앙은 날로 성장해 갔다.

이기원의 신앙 성장에 놀란 당회장 목사는 그가 25살이 될 때 17세의 김옥잠과 중매를 하게 되었다. 당시의 처녀들은 20세 미만이 가장 좋은 결혼 시기라 하면서 결혼을 많이 하였다. 이 일로 인하여 이기원과 17세밖에 안된 김옥잠이라는 처녀는 교역자의 주선으로 선을 보았고 이후 그가 다니고 있는 경주 중부교회 담임목사의 집례로 결혼식을 거행하게 되었다. 결혼식을 올린 뒤 이기원은 경주시 경주읍 사무소 수도계 기술자로 취직을 하게 되었고 좋은 직장을 갖게 되면서 이기원은 자신도 모르게 더 열심히 교회에 봉사를 하였다. 당시 경주중부교회는 설립된 지 얼마 안 되었던 관계로 교인 수는 20여 명 밖에 되지 않았다. 이러한 관계로 교역자를 모실 수 있는 재정적인 여건이 안 되자 교역자가 부재 시는 이기원 집사가 도맡아 설교를 하였지만 그는 조금도 방심하지 않고 경주중부교회가 부흥이 되어야 한다는 의식을 갖고 열심히 봉사를 하였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교역자 사례비가 부족할 때는 부족한 액수를 채워서 지불할 수 있도록 힘껏 도와주었던 신자가 바로 이기원 집사였다.

한때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을 때 한국교회는 심한 탄압을 받을 때가 있었다. 바로 일제는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고 이 전쟁에서 승리를 하려면 종교인들이 열심히 힘을 모아 예배를 드려야 한다면서 교회를 간섭하기 시작하였다. 만일 이러한 일에 협력을 하지 않을 때는 그 즉시 목회자를 일본 경찰관이 체포 령 장 없이 즉시 체포했던 일이 다반사였다. 그러나 태평양 전쟁에 일본이 패망하자 즉시 조선반도는 미군과 소련군이 상륙을 하였다. 여기에 소련군이 이 전쟁에 참여를 하였다. 이러한 관계로 소련의 발언권이 커지면서 미군은 약간 주춤하기도 하였다. 결국은 소련군의 참전으로 인하여 한반도는 양대 국가의 군인이 진주하면서 북위 38선을 중심으로 한반도를 두 동강으로 만들고 말았다. 두 동강으로 나뉜 조선반도에서는 38도선 이남은 미군이 점령을 하였기에 신앙의 자유가 허용되자 이기원은 자신이 출석했던 교회를 목조건물로 70평의 예배당을 신축하고 헌당식까지 갖게 되었다. 교회가 안정이 되자 장로를 선출해야 한다는 교인들의 여론에 따라 54년 봄에 장로로 선출되고 당회장의 지도를 받고 장로로 장립을 받게 되었다. 그러던 중에 이북에서 피난 나온 이00씨가 생활이 어려워지자 이00씨의 빚을 갚기 위해 빚 보증을 서서 돈을 빌려 오게 되었다. 그런데 사업이 잘되지 않아 빚을 떠안았고 빚을 갚는 데 10년이나 걸리고 말았다. 그런데도 불평 한마디 없이 그 빗을 대신으로 다 갚아 주기도 하였다.

교인들이 모여 들자 교회당이 너무나 낡아 새로 신축하기로 하고 1977260평의 교회당을 완성하고 197812월에 교회당을 봉헌하게 되었다. 교회당을 봉헌 하려고 하면 빚이 없어야 한다는 사실을 이기원 장로는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의 집을 교회당에 바치고 말았다. 그는 너무나 마음이 기뻐 시간이 있을 때마다 찬송을 즐겁게 불렀는데 그 찬송이 바로 내 주 하나님 큰 은혜는 저 큰 바다보다 깊다. 너 곧 닻줄을 깊은 대로 저 가운데 가보라/언덕을 떠나서 창파에 배 뛰어 내 주 예수 은혜의 바다로 네 마음껏 저어가라.”

이기원 장로는 성격이 온유하고 교회의 어려운 일이 생기면 남을 원망하지 않고 이것 모두 제 탓입니다하고 그 빚을 다 갚았다고 한다. 그는 교회의 일만이 아니라 <국제와이즈멘 경주지회>를 조직할 때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1973년 회장으로 선임되기도 하였다. 그가 회장직을 맡으면서 경주 와이즈멘은 활발하게 활동을 하자 경주 시내에 거주하고 있는 신자나 불신자를 막론하고 그의 활동에 감동을 받고 스스로 와이즈멘에 가입한 사람이 해가 바뀔 때마다 증가하자 사회봉사를 위해 많은 일을 했다고 한다. 이러한 봉사를 했던 그는 33녀를 두었는데 이 중에는 목사로, 장로로, 집사로 아버지의 정신을 따라 열심히 봉사를 하고 있으며, 이기원 장로가 별세하자 그의 후손들이 그의 유지에 따라 조의금(弔意金)과 그의 모든 재산을 합쳐 <기원장학회>를 만들어 경주중부교회의 불우한 남녀 학생들을 돕고 있다고 한다.

이기원 장로가 만든 장학금을 받았던 학생들은 더 열심히 공부를 하여 좋은 성적이 경주에 있는 모든 학생들에게 자극을 주며 더 열심히 공부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마련해 주기도 하였다. 바라기는 이러한 일에 전국 교회가 동참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 뿐이다.

 

김수진 목사 <한국교회역사연구원 원장>

[ 저작권자 ⓒ 장로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저작권문의
이번호 많이 본기사
기드온의 ‘금 에봇’
타락한 천사, 사탄, 루..
[장로] 평생을 교회·..
147. 철종의 가계도 ..
<94-총회총대5>
332. ‘기도합니다’와..
59. 초락도 금식 기도..
“사나 죽으나, 선하게 ..
331. ‘고범죄’에 ..
<94-총회총대4>
만평,만화
세계선교주일, 우째 이런일이~
입춘
고향 교회로 출발~
공지사항
[정기휴간]5월 10일자
[9월 28일자] 추석연휴 휴간..
회사소개구독신청 지사 Contact Us Site Map

한국장로신문의 모든 콘텐츠(기사) 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ㆍ복사ㆍ배포 등을 금합니다.
청소년보호책임자: 이승담 | Copyright (c) JANGRO.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