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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14호]  2018년 10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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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유(豆乳)
[[제1596호]  2018년 5월  26일]

소년은 급사였다. 황해도 보통학교만 졸업하고 서울에 왔다. 홀어머니 밑에서 가난하게 자란 그는 대중목욕탕 심부름꾼부터 모자가게 점원에 이르기까지 닥치는대로 일을 했다. 그러다 우연히 의학강습소의 급사 자리를 얻게 됐다. “자연스레 교재를 들여다봤죠. 용어가 어려워 옥편을 뒤져가면서 독학을 하다 보니 ‘나도 한 번 해볼까’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당시에는 의대에 다니지 않아도 시험만으로도 의사자격증을 딸 수 있었다. 주경야독으로 의사고시에 매달린 지 꼬박 2. 그는 20세에 의사고시에 합격했다. 주변에선 국내 최연소 의사라고 축하해줬다. 시험에 합격한 해인 1937년 서울 성모병원의 의사가 됐다. 병원 생활은 평탄했지만 수십 년 뒤 그의 인생을 바꿔놓는 사건이 생겼다. 뼈가 앙상하고 배만 볼록 솟아오른 갓난아기 환자가 병원에 온 것이었다. 아이 엄마는 평북 신의주에서 아기를 업고 꼬박 하루 걸려 왔다고 했다. 어렵게 얻은 아들이라며 제발 살려 달라고 애원했으나 차트를 보니 병명이 소화불량이었는데 아이는 끝내 세상을 떴다. 어떤 의사도 아이를 살릴 수 없었다. 이후에도 복부 팽만으로 병원을 찾은, 적지 않은 신생아들이 설사만 하다가 무력하게 죽어갔다.

 의사가 된 청년은 자책과 의문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원인 모를 병으로 죽어가는 이 아이들을 언젠가는 고쳐야 겠다’고 다짐했다. ‘유학을 가보자.’ 주변에서는 반대했다. 그에게는 아내와 6남매가 있었고, 의사로서의 안정된 삶도 보장돼 있었다. 하지만 아이들을 살려내야 겠다는, 의사로서의 사명감을 떨칠 수 없었다. 영국 런던대에 공부하러 갔으나 뾰족한 수를 찾지 못했고, 곧장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UC메디컬센터로 건너가 미국에도 비슷한 증상이 있나 샅샅이 뒤져봤다. 1964년 그는 도서관에서 교재를 읽다가 무릎을 쳤다. 바로 ‘유당불내증(乳糖不耐症)’이 소개된 대목이었다.  20여 년간 지녀온 의문의 실마리가 풀리기 시작했다. 유당불내증은 우유나 모유의 유당을 분해하는 효소가 부족한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증상이다. 이 증상을 가진 신생아는 모유나 우유를 소화하지 못해 영양실조로 죽고 만다.

우유 대용식을 만드는 게 급선무란 생각이 들었다. 그는 어린 시절 어머니가 끓여 줬던 콩국을 떠올렸고, 그 길로 한국으로 돌아왔다. 이후 서울 명동에서 ‘정소아과’를 운영하며 아내와 함께 우유 대용식 개발에 매달렸다. 아내가 콩을 맷돌로 갈아 콩국을 만들면 그는 콩국의 영양이 충분한지 분석했다. 병원 지하에 실험용 흰 쥐를 잔뜩 갖다 놓고 콩국을 먹인 쥐에게 유당불내증이 나타나는지 등을 실험했다. 주변에선 “정소아과 원장이 미국에 다녀오더니 이상해졌다”고 수군댔다. 이렇게 3년 남짓 연구한 끝에 두유를 개발해냈고 이것을 설사병에 걸린 신생아들에게 줬다. 병상의 아이들은  눈을 뜨면서 기력을 차렸다. 콩에는 필수영양소(단백질 40%, 탄수화물 35%, 지방 20%)가 들어 있지만 유당은 들어 있지 않다. 인생에서 최고로 기뻤던 순간이었다. 환자가 몰리자 두유 수요가 달렸다. 결국 1973년 ‘정식품’이란 회사를 세워 두유 대량 생산에 나섰다. 콩국이 식물성 우유라는 점에 착안해 식물(vegetable)과 우유(milk)의 영문명을 합쳐 ‘베지밀’이라는 이름을 지었다. 그가 사명감을 갖고 만든 베지밀은 지금도 두유업계 부동의 1위다. 이것은 정재원 정식품 명예회장의 이야기다. 그는 99세 나이로 백수연을 치렀고 향년 100세로 별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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