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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건국대통령 이승만 장로 편 - 이승만이 꿈꾸웠던 차별없는 세상, 강력했던 토지개혁
[[제1553호]  2017년 6월  17일]


국민이 주인이라는 말은 하면서, 정치적으로 투표도 하고 선거도 하지만, 정작 그 국민들이 노예처럼 살아간다면 제대로 된 민주주의가 정착할 수 없다. 국민이 소작인들이라면, 국민이 주인이 아니라 지주가 주인이 된다. 지주에게 잘못 보이면 당장 굶어죽기를 염려해야 할 처지라면, 자유니 인권이니 하는 말들은 무의미해진다. 경제적 자립이 없는 정치적 민주주의는 그림의 떡에 불과하다. 저명한 심리학자 에리히 프롬의 명언처럼, 빵이 없는 자유는 자유가 아니다.

이승만은 토지개혁을 단행하기에 너무나 적합한 인물이었다. 왕족에 양반 출신이었지만, 가난한 동네에서 빈민들과 벗하며 자라난 그에게는 누군가를 차별한다는 의식이 없었다. 그의 평생에 걸친 발자취가 이 사실을 증명한다.

이승만은 양반과 상놈의 차별이 없는 세상을 꿈꾸었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한 가장 중요한 방법이 토지 개혁이었다. 한국 사회는 오랫동안 토지에 기반을 둔 지주계급에 의해 지배당해왔다. 조선 시대의 지주들은 양반이었다.

양반 제도 혁파 논의는 1880년대 이래 개화파 관료들에 의해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 1894년에 갑오경장의 일환으로 양반의 특권을 제약하는 개혁이 시도되기도 했다. 그러나 갑오경장이 개혁은 인재 등용에 있어 양반과 상민을 구별하지 않는다는데 중점을 두었을 뿐이었다. 양반들의 경제적 기반인 토지문제에는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 따라서 양반 제도 자체를 없애지는 못했다. 1910년 이후 일제는 한국 민중을 효율적으로 지배 내지 착취하기 위해 양반 배경의 지주들을 보호하는 정책을 채택했다. 따라서 양반 제도는 표면상으로 사라졌지만, 사실상 해방 이후까지 온존되었다. 국군을 창설하는 과정에서 양반 출신만 받아들여야 한다고 고집했던 광복군 출신 지도자가 있을 정도였다. 결과적으로 우리 역사 오천년을 지배했던 양반제가 붕괴된 것은 이승만이 추진한 농지개혁을 통해서였다.

대한민국의 토지개혁은 합법적인 절차를 따라서 진행되었다. 1948717일에 제정된 제헌 헌법 86조는 농지는 농민에게 분배하며 그 분배의 방법, 소유의 한도, 소유권의 내용과 한계는 법률로써 정한다고 명시했다. 나라가 세워질 때부터 농지는 농민이 소유한다는 원칙을 아예 헌법으로 정해놓은 것이다.

이승만 정부는 헌법에 따라 농지 개혁법 제정을 추진했다. 대통령 앞에 놓인 농지개혁안은 세 가지였다. 좌파적 성격을 띠고 있던 조봉암의 농림부안, 보수 우파 지주 세력이 장악했던 한민당의 국회안, 그리고 총리실 산하 기획처안 등이었다.

토지개혁은 국민들에겐 해방이었지만, 지주들에겐 기득권의 박탈이 될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첨예한 대립이 벌어졌다. 이승만은 세 가지 제안을 상세히 검토하고 국회의 실력자들을 일일이 만났다.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당사자들을 설득하여 적절한 양보를 유도해냈다.

조봉암의 농림부안은 토지 보상 문제에서 매수가 아닌 징수라는 개념을 사용해서 도마 위에 올랐다. 이 문제는 단순한 정책상의 차이가 아닌 정치 노선 싸움으로까지 번졌다. 결국 농림부안은 세력 싸움에서 밀려 국무회의도 통과하지 못했다. 그런데도 오늘날 토지개혁이 공산당 출신의 좌파 조봉암의 작품인 것처럼 알려져 있다. 잘못 전해진 역사의 한 사례이다.

지주들이 중심이 된 한민당 안은 아무래도 개혁에 소극적일 수밖에 없었다. 결국 농지개혁법은 기획처 안을 근간으로 해서 1949621일에 선포되었다. 법안의 핵심은 농지 소유의 상한을 3헥타르로 정하고, 그 이상의 모든 농지를 지주로부터 유상으로 수용하여 소작농에게 유상으로 분배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법률을 시행하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하자가 드러났다. 이 법안은 수정을 거쳐서 1950310일 국회에서 개정 법률로 통과되었다. 3대 윤영선 농림부 장관 때였다. 이제 통과된 법률을 집행하려면 시행령이나 시행규칙을 제정해야 했다. 여기에서 또 한번 이승만의 타이밍 감각이 발동했다. 그는 시간이 없다고 판단했다. 이런 저런 규칙과 법규를 따지고 있다 보면 봄철 파종기를 넘겨야 한다.

그러면 또 1년을 허비해야 하고 국민들은 1년 더 소작농으로 매여 있어야 한다.

규칙을 만드는 과정에서 지주들이 반발할 가능성도 없지 않았다. 이승만은 비상수단을 동원했다. 대통령의 특별유시로 분배 농지 예정 통지서를 배포해 버렸다. 이미 분배가 예정되었다는 통지를 보냄으로써 토지개혁을 기정사실화 해버린 것이다.

소작료는 수확량의 50% 선이었다. 해방 이후에는 30% 선으로 떨어지기도 했다. 농지개혁법이 논의될 때, 분배 대금은 수확량의 300% 선이었다. 다시 말해서 소작료를 50%로 계산하면, 소작료 6년 차를 내면 7년째부터는 땅 주인이 되어서 소작료가 면제되는 셈이다.

이것만해도 엄청난 혜택이다. 수십 년 소작료를 꼬박꼬박 바치고도 소작지를 잃을까봐 두려워했던 수천 년 역사에 비교해보면 혁명과도 같은 개혁이다. 하지만 이승만은 300%도 많다고 생각했다. 그는 카리스마를 휘둘러 절반을 잘라냈다. 결국 농지 분배 대금은 일 년 수확량의 150%로 결정되었다.

소작료 50%로 계산하면, 3년만 소작료를 내면 그 다음부터는 지주가 되는 것이다. 농지 개혁의 가정에서 이승만은 비상하게 간섭했고 비상조치를 취했으며 때로는 강권적인 조치를 발동시켰다. 그것은 국민에 대한 애정이 표현이었다. 수확량의 150%를 내면 지주가 될 수 있다는 것은 획기적인 조치였다. 그런데 실제로 농민들이 받은 혜택은 그것보다도 더 컸다.

이승만의 강력한 주도에 국가가 강제력을 발동할 것을 염려한 지주들은 개혁이 시행되기도 전에 토지들을 처분해 버렸다.

과거에는 이때 지주들이 비싼 값을 다 받았기에 토지개혁은 큰 의미가 없다고 주장하는 비판적인 견해가 있어 왔다. 하여간 이승만과 대한민국은 어떻게 해서든 깎아내리려는 시도들이었다.

하지만 최근의 연구들은 일반적으로 지주들이 먼저 팔아서 받은 돈의 액수가 법정에서 정한 상환가격보다 높지 않았다는 점을 드러낸다. 대략 법정가격의 20~70% 수준이었으니, 형편없이 싼 값이다.

이처럼 지주들이 적은 가격에 대량으로 토지를 팔아버린 이유도 이승만 정부가 강력하게 개혁을 추진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것도 토지 개혁의 효과로 볼 수 있다.

이호 목사

<신안산대 겸임교수거룩한 대한민국 네트워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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