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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도 물러나야 돼, 그게 민주주의니까”
[[제1593호]  2018년 5월  5일]


422일 이승만은 시위로 부상당한 학생들이 입원한 병실을 방문했다. 그것은 참으로 기묘하고 안타깝고 슬픈 장면이었다. 기묘한 점은 노인 대통령과 젊은 학생들이 서로를 향한 적의(적의)를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자신들을 다치게 한 권력자를 향해서 분을 낼 법도 하고, 본인더러 물러나라고 한 학생들에게 화를 낼 법도 한데, 그 자리에선 분도 없었고 화도 없었다.

피 흘리며 신음하던 학생들은 대통령을 보고 일제히 외쳤다. “할아버지!” 아마 학생들도 알지 않았을까? 결과적으로는 이승만의 잘못이지만, 인의 장막에 둘러싸인 대통령이 부정을 모르고 있었다는 것을, 데모하다가 다쳐서 상한 다음에도 이승만은 여전히 젊은이들의 할아버지였다. 그날, 이승만도 울었고 학생들도 울었다. 다친 학생들을 하나하나 어루만지면서 이승만은 눈물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학생들이 왜 이렇게 되었어? 부정을 왜 해? , 부정을 보고 일어서지 않는 백성은 죽은 백성이지! 이 젊은 학생들은 참으로 장하다.” 425일에는 상아탑을 지키던 교수들이 일어났다. 서울 시내 250여 명의 교수들이 선거 부정을 규탄하는 서명을 하고 거리로 나섰다. 당시 고려대 교수 이항녕은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당시 교수들 분위기가, 이제 붙들려가도 상관없다는 의식이 생겼다. ‘학생의 피에 보답하자고 써서 깃대를 만들고 대형 태극기를 준비해서 시위했다. 국회까지 행진하는데 학생과 군중이 수만 명이었다. 가다가 구호를 부르는데 조윤제가 이대통령 물러가라. 대법원장 물러가라고 말했다. 대통령 물러가라는 구호가 처음 나왔다. 그때까지 그런 구호는 없었다.”

이항녕의 증언에 의하면 이승만의 하야를 요구한 구호는 425일에야 나왔다. 그 전까지는 부정을 비판하고 자유당을 비난하며 부통령을 다시 뽑아야 한다면서도, 대통령을 물러나라고는 하지 않았다. 그만큼 이승만에 대한 국민들의 애정이 각별했다는 증거이다.

국부(國父)로 추앙받던 이승만에게 최초로 하야를 요구한 인물, 조윤제는 저명한 국어학자였고 민주 투사였다. 흔히 한국인의 특질을 은근과 끈기로 표현한다. 은근과 끈기를 대표적인 우리 민족성으로 제시한 인물이 바로 조윤제이다. 은근과 끈기로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는 민족의 정신이 마침내 혁명으로 폭발하는 현장에 바로 그가 있었다.

조윤제는 자신의 묘비명을 직접 지었다. ‘생어민족 사어민족(生於民族 死於民族)’ 살아도 민족을 위하여, 죽어도 민족을 위하여 가슴에 민족을 품었던 한 생애의 찬란한 문장이었다. 4.19를 선과 악의 대결로만 보면, 영혼을 울리는 역사의 메아리가 들리지 않는다. 이승만은 악이요. 시위대는 선이라고 매도해 버리면, 역사의 깊은 진실을 알지 못한다. 4.19혁명은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하다. 민족을 위해서 살고 죽은 이승만에게 역시 민족을 위해서 살고 죽은 조윤제가 퇴진을 요구했다. 목숨을 걸고 맞붙은 양쪽이 모두 애국자였고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사상가들이었으며, 행동하는 지성이었다. 역사란 이렇게 깊은 것이다.

426일은 승리의 화요일이었다. 새벽부터 대규모 군중 시위가 벌어졌다. 학생들과 시민들은 대표단을 구성하여 대통령과의 면담을 요구했다. 그날, 남산(南山)이 있었다. 시인 서정주는 젊은 날 전기를 쓰기 위해서 이승만을 자주 만났다. 가끔 이승만은 자신이 쓴 한시를 들려주곤 했다. 서정주에게 인상 깊었던 시에 남산이 등장한다.

하늘과 물 사이를 이 한 몸이 흘러서

그 끝없는 바다를 얼마나 여러 번 오갔나

닿는 곳곳에는 명승지도 많더라만

내 꿈의 보금자리는 서울 남산뿐

대통령의 시 낭송을 듣던 서정주는 순간, 가슴이 북받쳐 오르며 눈물이 났다고 한다. 이런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여기 누워계신 이 영감님이 쇠약해져 들어가던 조선 말기부터 이 나라 자주 독립운동이 대표자로서 3.1운동 직후에는 중국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맨 처음 대통령이시다. 그 뒤 다 늙은 할아버지가 되어 귀국하시기까지 오직 이 민족의 해방만을 위해 동분서주하고 다니시면서도 마지막까지 그 사슴 속에 못박아 가지고 다녔던 그 서울의 남산! 그 남산!

운명의 그날, 이승만은 묵묵히 남산을 바라보있다. 기약 없는 망명 생활에서 꿈에도 그리워했던 그 남산이었다. 시민 대표들은 이승만의 하야를 요구했다. 이승만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도 물러나야 돼, 그게 우리 민주주의니까.” 그로써 이승만 정권 12년은 끝났다.

 

4.19를 어떻게 볼 것인가?

이제까지 4.19는 다양하게 생각할 주제가 아니었다. “이승만의 독재와 국민의 저항이라는 단답식으로 끝내왔다. 하지만 5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이제는 차분히 생각할 시간이 왔다. 4.19를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첫째로 이승만 정권의 실정으로 4.19가 일어났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국무회의까지 이승만은 정확히 진상을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변명의 이유가 되지 못한다. 인의 장막에 둘러싸여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장막을 친 사람들은 그가 등용한 인물이었다. 최고 책임자는 이승만이다. 187명의 무고한 생명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수천 명을 다치게 만들었던 비극은 이승만의 실패를 웅변한다.

둘째로 4.19는 다른 한편으로는 이승만의 성공과 실패가 함께 작용한 결과이다. 박멸임(朴明林)이승만의 실정과 업적이 4.19를 불렀다.”라고 말한다. 조갑제 역시 이승만은 자기 성공의 희생자라고 평가한다. 이는 여러 가지 사실로 확인된다. 4.19의 주역은 학생들이었다. 학생 수가 비약적으로 늘어난 것은 이승만의 교육정책이 성공했기 때문이었다. 일제 시대에 어떤 형태로든 교육을 받은 사람은 전 국민의 14%에 불과했다. 이승만이 집권한 이후, 세계 최빈국 수준의 경제 상황에도 불구하고 매년 정부 예산의 10% 이상을 교육에 쏟아부었다.

그 결과로 취학 연령기 아동의 96%가 입학하는 교육 기적을 이루어냈다. 그렇게 입학한 학생들이 학교에서 배운 것은 민주주의였다. 소설가 김승옥(金承鈺)은 한 좌담회에서 이승만 정권기의 학교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학교에서는 민주주의에 대한 이론적인 학습만이 아니라 초등학교에서까지도 반장을 선거로 뽑는 등 제도적 장치의 도입을 통해 실제로도 민주주의 훈련을 받을 기회가 있었다. 교육에 성공해서 학생들이 늘어났고 민주주의를 가르쳤기 때문에 학생들이 봉기할 수 있었다.

이호 목사

<신안산대 겸임교수거룩한 대한민국 네트워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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